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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월간 권태 2호 비하인드 -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by 월간_권태 2021. 3. 18.

국립현대미술관 2020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신 김민애 작가님의 작품입니다. 계단에 붉은 카펫을 깔고, 빌리 조엘의 노래를 튼 설치작품입니다. 감명 깊어서 한 장 찍어왔습니다.

 

 

*월간 권태 2호를 만들면서 느꼈던 감정을 간단하게 적어보았습니다.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2020년 상반기의 심정은 딱 이것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되었다. 휴학 한 번, 교환학생 한 번 없이 꾸역꾸역 쉼표 없이 달려온 결과였다. 왜 한 번도 쉬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것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지역에서 공부로는 한 가닥 했다는 학생들만 모인 특수목적고에서 경쟁하고, 수능을 두 차례나 치렀다. 마지막으로 쉬었던 건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누워서 지냈던 그해 겨울이었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도 무언가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고서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고, 경주는 그때 다시 시작해서 끝나지 않았다.

 


경쟁과 승부사의 연속이었던 학생시절 자부심으로 지니고 다니던 건 여유였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고민한 적도 없고,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었다. 그래서 몸은 바빠도 마음은 여유로웠고,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나 자신을 구출해 주었다. 시간은 흘렀고 삶이 나를 조금씩 깎아먹어 부스러기만 남았던 2019년 겨울, 난 여유있는 체 하며 친구에게 조언을 건넸었다. "자신을 깎아먹으면서까지 계속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네 의사와는 관계 없이 멈출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거야." 사실 그 말은 나에게 해야 했던 말이었다. 그 학기에 내 학점은 곤두박질쳤고, 꿈은 불투명해졌으며, 자잘한 인생의 재미를 잃었다. 내 의사와 관계 없이 멈춰버린 건 나였다.

 


그 시간 동안 구상했던 소설은 두 편이었다. 한 편은 유쾌한 <어느 비행>이었으며, 다른 편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그 가정의 방문>이었다. <어느 비행>을 쓰면서는 일말의 희망을 생각했다. 개인의 비행이, 질병이, 혹은 소수자성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탐구했었다. 듣고 싶었던 말, 도출해 내려던 결론은 뻔했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얘기가 듣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은 몽롱한 안도감을 머금어 있었다. <그 가정의 방문>은 자신이 만든 미로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썼다. 자가당착 상태에 대한 묘사를 세세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부의 타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꼼꼼히 논리를 만들어 자신을 감쌌지만, 그 방어기제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행해지는 것을 주제 삼아 글을 썼다. 두 편의 글을 쓰는 것은 여유가 조금도 없는데 여유있는 척 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척 하는 일상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월간 권태가 시작되었다.

 


월간 권태를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우울감 내지는 권태감에 내가 가라앉아 있다면, 그 감정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도는 정확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주위를 더듬듯 글을 썼고, 시시각각 느껴지는 변화에 집중했다(이후 이 경험은 소설 <심들의 도시>를 집할 때 반영되었다). 그리고 주제넘지만, 나에게만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서 아는 친구들 중 가장 글을 잘 쓰는 둘을 모아서 잡지를 꾸렸다. 그렇게 글을 썼고, 이해하지 못 했던 것들을 이해하기 생각했고, 슬픔에 가만히 잠겨있는 대신 발버둥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은? 창간호를 내고 2호를 준비하는 과정은 창간호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아직도 난 가라앉은 바닥을 더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유라고는 없는 삶도 어쨌든지 계속되고 있다. 다른 것은 하나뿐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을 배운 것일까, 그럼에도 계속 나아갈 의지가 생겼다. 전처럼 여유 넘치는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계속 나아가기만 하자는 마음이다. 2호의 주제는 <변화>이다. 잡지에게도 시기적절한 주제지만 나에게는 더욱더 적당한 주제였다. 지난 해 썼던 <어느 비행>을 다시 쓰고, 새롭게 <심들의 도시>를 쓰면서 가장 많이 변화한 사람은 나일 것이다. 그저 많은 것들이 변화했고 그 안에서 배운 것들이 많다,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듯 하다.

 


없었는데, 이제 있나요?

 

 

 


*월간 권태 2호 텀블벅http://tumblbug.com/200506?ref=discover

 


전여운 |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제학도입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깨달음들을 기록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 이야기들을 씁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생각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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