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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화의 과정

by 장상🐳 2020. 5. 29.

 

미셸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소화의 과정

 

김수빈

 

1.

 

지독한 악몽이었다. 잊어버릴 때 즈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그렇게 시달리고 나고 깨면, 다시 그 꿈을 꿀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분 나쁜 미묘함에 잠시 머리를 짚고 있다 보면, 곧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고, 곧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몽의 후유증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이 기분 나쁜 꿈보다 현실이 더 악질일 수는 있겠지만.

씻으러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더 본다. 3월 29일, 아침 6시 반이다. 딱히 기억나는 일정이라곤 없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 늘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몸이 시원찮다. 기지개를 쭉 피며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찰나, 누군가 문 밖에서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문을 쑥 밀며 들어온다. 나는 무방비 상태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서서히 올린 시선 끝에 서있는 외부인, 하얗고 멀건 청년 하나가 서 있다. 까무잡잡한 편인 나보다 피부가 너무 창백해서 가끔 시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청년이 본인도 다소 놀란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시에 열었네.”

“····뭐야”

“놀랐어? 미안”

 

그는 얼굴처럼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움켜쥐고 있는 투명한 유리잔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건넨다. 늘 그렇게 어정쩡한 사람이었다. 마치 로봇처럼, 실행하려던 행동은 끝내고야 마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애인이 본인 덕분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더라도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욕을 하며 생뚱맞고 처량하기 그지없는 유리잔을 받아든다. 유리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을 보아하니, 따라 놓은 지 꽤 된 듯한데. 방에 들어올까 말까 꽤 고민한 눈치다.

 

“왜 왔어?”

“그냥, 일어났을까 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나는 싫은데.”

“나도 싫어. 너가 연락도 없이 나 피하는 거”

 

내가 접한 일부만을 가지고 일반화하기는 정말 싫은데, 정말 내가 지금껏 만난 남자들은 전부 연락과 나의 잠수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잘 알려주지 않는 그런 미묘한 신비함에 반한 거면서, 연락 꼬박꼬박 하고 매일 만나면 곧 흥미를 잃을 거면서. 나는 늘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종종 만남을 미루고 연락을 피했다. 그래야 더 애가 타고, 날 더 좋아하게 될 테니까. 유리 잔 속의 금붕어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내 앞의 이 청년은, 이 방식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다. 그렇다면 자기가 어쩔 건가. 이렇게 불쑥불쑥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는 것도 참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 아침부터 정말 전체적으로 애인에게 정이 떨어진다. 나는 마치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가냘픈 눈빛으로 나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이 남자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원래 유리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실 중앙의 탁자에, 남자가 쥐어 준 유리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남자가 터덜터덜 내 뒤를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멍하니 맞은 편 벽을 쳐다보았다.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그러니까 한 5년 전부터 그대로였던, 원래는 스카이블루였지만 지금은 곳곳에 누런 자국들이 낀,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휑한 벽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벽을 쳐다보면 마치 내가 벽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매직아이를 보는 것처럼 벽의 얼룩들이 흐릿해질 때까지 눈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운 내 애인은 내가 본인의 무단 침입에 대해 고뇌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괜스레 머쓱해하며 집을 나갈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남자를 신경 쓰지 않은 체, 그러니까 그 남자가 현관문이 아니라 거실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며 계속해서 벽을 바라본다. 조금 후에, 내 남자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유리잔을 들어 내가 쳐다보고 있던 벽에 냅다 집어 던진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차고,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유리 파편들을 피하려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꽤나 당황스럽다. 이런 돌발행동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왜 이 사람은 남의 집에서 갑자기 남의 유리잔을 깨뜨리는 거지?

 

“씨-발.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하얗고 삐쩍 마른 잘생긴 남자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쌍욕이 그 얄쌍한 입술에서 우다다 쏟아진다. 나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 더더욱 아득해진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벙벙하고, 남자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 마치 내가 유리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젠 점점 그 안에 물이 차는 것 같다.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내 어장 속에서 놀아나는 잘생긴 남자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당장 날 죽일지도 모르는 예비 살인자가 나와 함께 있다.

 

“내가 어제 몇 번을 전화했는데, 미안하지도 않아? 그래놓고 나를 무시해?”

 

갑자기 어디선가 울리는 큰 음악 소리에 심장이 쿵.

남자 친구였던 그 남자의 폭언을 중단할 사건이 생겼다. 갑자기 내 핸드폰에서 엄청 큰 소리로 음악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 사실 나는 그게 전화가 온 것이 아니라 알람이라는 것을, 또 무엇을 위한 알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엄마 전화야. 들릴 텐데, 계속 거기 서서 욕 할 거야?”

 

남자는 얕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곧 겉옷을 챙기고 씩씩거리며 집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알람을 껐다. 핸드폰 화면에는 [현주 기일]이라고 되어있었다. ‘현주’라는 이름과 ‘기일’이라는 단어 조합이 왜 그렇게 소름이 돋을 만큼 낯선 지. 이제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심지어 소름이 돋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실 한 편에 널브러져 있는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내 단잠을 깨운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눈이라도 좀 감고 있어야겠다.

 

 

 

2.

 

갑자기 눈이 확 떠졌다. 난 지금 살짝 미끌거리는 투명한 바닥에 누워있다. 분명 내 방 침대는 아니고.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에, 온 사방이 뿌옇고 울렁거린다. 마치 개울가에서 물 속 안을 바라보는 것처럼. 내 시야에서 파도를 치듯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보니, 내가 아마 물 속에 있는 것 같다. 큰일 났네, 나는 수영을 못하는데. 그러고 보니 심지어 물속에서 내가 눈을 뜨고 있네. 뭐야, 꿈이네.

그 때, 저 멀리서 살구 색의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냥 커다란 색깔 덩어리. 점점 다가오다가 멈춘다. 나는 그것에게로 다가가려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물속에서 걷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다. 좀 걸어도 좀처럼 닿지를 않아, 겅중 겅중 그것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다가 그것에게 닿기도 전에 꽝, 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버렸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인 지 알 정도로 머리가 울리는 고통, 그제야 나는 그 거대한 색깔 덩어리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 벽에 갔다대었더니, 그 살색 덩어리는 점점 커지더니(마치 얼굴을 들이미는 것처럼) 곧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나를 향해 있었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작아졌어?”

“현주?”

 

이 목소리는 현주다. 내 눈 앞에, 내 몸집의 백배는 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유리벽 바깥의 저 거대한 살색 덩어리는 현주다. 현주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너 왜 여기 들어가 있어? 여기 물고기 집인데.”

 

기가 차다. 6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왜 여기 있냐는 타박이라니. 심지어 더 화가 나는 건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도 모르겠어. 눈 떠보니까 여기 안에 있어.”

“알고 보니 너가 우리 집 물고기였던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네.”

 

오랜 만에 보는 현주 얼굴은, 뭐 예전과 똑같았다 이런 말을 해야 애틋하겠지만, 정말 커다란 살색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아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나마 얼굴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집만한 눈알이 끔벅거린다는 것. 어항 속 금붕어가 사람을 쳐다볼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현주가 눈동자를 끔벅거릴 때마다 그게 그렇게 기괴할 수가 없었다.

 

“현주야,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글쎄. 그건 그렇고 너는 날 너무 보고 싶어 하더라”

 

그럼 그렇지. 현주 너는 날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어. 지켜봐 줘서 고마워.

 

“현주야,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넌 왜, 그 때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어? 대체 왜 전화한 거야, 나한테?”

 

현주의 눈동자가 끔벅거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 채 되기 전에 현주의 얼굴로 추정되던 커다란 살색 덩어리가 점점 멀어진다. 현주가 대답을 하지 않고 사라질 모양인가 보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내 몸이 갑자기 저 깊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낀다. 현주가, 화가 나서 내가 들어있던 어항을 엎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저 깊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한 아파트 7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데. 저 바닥에 닿으면 내 몸은 터져버리겠지. 물론 그 전에 죽을 수도. 물속에서는 잘만 쉬어지던 숨이 갑자기 막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말 아가미가 생기고 폐가 없어졌던 건가. 힘겹게 가빠오는 호흡이 점차 멎어질 때쯤, 그리고 추락하던 내 몸이 이제 거의 바닥에 다다랐을 때 쯤, 어디선가 아득하게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아는 말. 현주가 마지막으로 전화해서 했던 말.

 

“나는 너가 너무 지루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전염되는 것 같아, 너한테.”

 

 

*

 

 

한동안 잊었었던 기억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추락을 멈추고, 그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내가 진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 건지, 아니면 그냥 기억을 재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때의 기억은 너무 생생하니까. 마치 그 장면을 녹화해서 두고두고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침대에 어떤 자세로 누워있었는지 조차, 그리고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똑같이 생각이 난다. 그 과거의 파편은 기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늘 나에겐 현재로, 옆에 항상 있었다. 밤 12시 16분, 나는 불판 위 새우처럼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치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서 한 스쿱 퍼내는 것처럼, 만약 현주를 내 삶에서 그렇게 퍼낼 수 있다면 과연 어디부터 퍼내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현주의 파편들은 그 이후에도 나에게 남아서 그 종자를 퍼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현주는 이런 생각을 할까? 현주에게 내가 너무 많아서 자신도 모르게 지긋지긋하다 이런 생각, 아니면 문득 매 순간이 너와 함께였구나 이런 감탄이라도. 현주 너는 나를 떠올려주기를 할까?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그 한 밤 중에.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의 순간에 상대가 현주인 것을 알아차렸던가? 아니,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화 걸어놓고 말이 없는 상대에게 나는 짜증이 났었고, 이내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했었다. 그 때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하지만 용케 현주는 타이밍 좋게 내가 끊기 직전 말을 걸었고, 나는 휴대폰을 꽉 붙들었다.

 

“넌 연락을 너무 많이 해. 그런 거 남자들은 안 좋아해. 답장 그렇게 바로바로 하면 연락하는 맛이 없잖아. 나중에 연애할 때 참고하라고.”

 

밤 12시 반에 전화한 것 치고는 내용이 생각보다 황당하며 심지어 예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넌 밥도 너무 빨리 먹어. 좀 천천히 먹고, 밥 먹으면서 딴 애들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

“그리고 넌···, 넌····, 나는 너가 너무 지루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전염되는 것 같아, 너한테.”

 

마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엄청난 역겨움을 느꼈다. 현기증이 나서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곧바로 비틀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까지 채 가기도 전에 이미 토를 뿜고 있었다. 한 밤중이어서 다행이지, 엄마가 보기라도 했으면 내 딸이 토 뿜는 용이 되어버린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한 차례 거하게 변기와 씨름을 하고, 한동안 화장실 바닥에 앉아있었다. 여기저기 물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바닥에 앉아있어서, 바지 엉덩이 부분이 축축해진 것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방에 들어가 내가 바닥에 내팽개친 있는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통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내가 다시 전화를 했어야 했나? 어쩌면 내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사이에 너는 이미 뛰어버린 뒤였을 지도. 내가 거하게 토하려 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있던 너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너를 패어낸 것이 아니라, 불쾌한 고통 안에서 악을 쓰고 너를 웩웩 뱉어내려 한 것이다. 그 마저도 실패했지만.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 다리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꽤 열정적으로 토를 해서 그런지, 속이 시원하고 피곤해서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나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밤이 꽤 추웠던 기억이 난다. 몸이 가볍게 떨릴 때마다 이불로 힘껏 온 몸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일어난 아침은 상쾌했다. 얼마만의 깨끗한 아침인지, 몸이 한껏 가벼워져 날아갈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낀 기분 좋은 아침에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 현주한테 전화 왔었니?”

“어, 왜?”

“현주가····, 어제 밤에 어디 간다고 이야기 했었니? 너도 같이 갔었어?”

“현주가 어제 어디를 갔는데?”

“현주가 가출했대. 어떡하니, 너는 몰랐어?”

 

내가 생생하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여기까지. 이후 엄마가 나한테 현주의 실종을, 그리고 곧 현주의 죽음을, 자살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주의 가출이 언제 현주의 자살 여행이 되었는지, 반 애들한테는 어떻게 알려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한테 말을 걸어보려고 입을 떼려는데, 입이 벌어지지가 않는다. 아, 나 아직 꿈꾸는 중이었지. 내 기억이 여기까지니 내 꿈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점점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꿈에서 깨는 중이다.

 

 

3.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난다. 귀를 울리는 쿵쿵거리는 소리.

주위를 둘러보니, 휴대폰에서 소리가 울리는 중이었다. 화면을 보니 이번에는 진짜 엄마한테 온 전화다. 다시 잠을 잘까, 생각하다가 전화를 받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자다 일어난 목소리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야, 안 아파.”

“너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는 거지? 집에 한 번 데리고 와. 사진으로만 보니까 애가 홀쭉하더라. 잘 먹고 다녀야지····.”

 

시장 장터에서 통화를 하는 건지 엄마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통화 음량을 키워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살짝 짜증이 났다.

 

“엄마, 지금 어디야? 잘 안 들려.”

“아, 오늘 장날이라서. 그래서 아랫집 아줌마랑 같이 뭐 좀 사려고 나왔지.”

“알았어. 그럼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전화해.”

“어머, 얘 벌써 끊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 엄마 집에 와서 밥이나 먹고 가. 방금 자반고등어 사왔어. 너 좋아하는 고등어구이 해줄게. 꼭 와서 먹고 가, 알겠지?”

“잘 안 들리네. 끊을게.”

“니 남자친구도 꼭 데리고 오고! 고등어구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엄마한테 이야기를 할 걸 그랬나, 그 홀쭉해 보인다던 남자친구가 나한테 쌍욕하고 갔다는 거. 남자친구한테는 고등어 살까지 친절하게 발라서 가져다 바칠 모양인데, 엄마가 그렇게 밥 챙겨주면 그 밥심으로 날 팰지도 몰라. 여전히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유리 조각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자기가 깼으면 자기가 치워야지, 이런 상도덕도 모르는 몰상식한 새끼 같으니라고. 바닥을 한창 빗자루 질을 하다 보니 슬금슬금 화가 났다. 연락을 안 한다고 그렇게 화를 낼만한 일인지, 오히려 남의 집에서 남의 유리잔을 깬 놈한테 내가 역정을 내야 하는 게 맞는 일이 아닌가.

 

띠링, 하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유리잔을 깬 본인이었다. 다행인 것은 전화가 아니라 문자라는 것. 전화를 했다면, 심지어 음성 메시지였어도 나는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까 미안했어. 연락이 안 돼서 걱정하느라 그랬는데...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

 

곧이어 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어제 현민이랑 만났다며. 걔 나랑 같은 회사 다니는데, 내 핸드폰에서 너 사진보고 깜짝 놀라더라.]

[나는 너가 걔는 만나고 나랑은 연락이 안 된다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근데 현민이가 그러던데 너 어제 토했다며. 몸은 괜찮은 거야?]

 

 

*

 

나도 내가 어제 현민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내 이름 석 자를 길 건너편에서 고래고래 외치는 현민이를 보면서, 고등학생 때 현민이랑 사귄 게 현주가 아니라 나였던 건가 잠시 고민했다. 현민이는 꽤 말끔해보였다. 그래서 너무 낯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날 현주의 전화를 받고 변기에 달려가 속을 게워냈던 그 때에 머물러 있는데, 현민이 너는 어쩜 그리 변했니.

아닌게 아니라, 현민이는 정말 많이 변해있었다. 교복 바지를 마치 타이즈마냥 허벅지 통을 아주 타이트하게 줄이고 교복 셔츠는 풀어헤쳐 다니며, 몸으로 자기가 이 사회에 반항한다는 티를 철철 내고 다니던 그 철없던 남고생은 없었다. 벌써 어디 변변한 직장이라도 다니는 듯 꽤 멀쑥한 정장 비슷한 복장을 입고 머리를 넘긴 모습은, 지금의 내가 고등학교 교정을 보면 느끼는 그 소름끼치는 낯선 느낌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에 현민이가 나에게 건넨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야, 너···, 너 정말 그대로구나.”

“너는 진짜 많이 변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나는 지금 잠깐 출장 나온 길이야. 너는 뭐하고 지내?”

“나는 아직 대학생. 휴학한 지 좀 됐어. 너는 벌써 취업했나봐?”

 

하핫, 하고 머쓱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제법 자기가 하고 있는 사회생활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민이는 막상 자기가 불러놓고는 머쓱한지 계속해서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지, 하며 적막을 깨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현주 장례식이었지.”

“그게 벌써 그렇게 됐나?”

 

사실 내일이 기일이야,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만 혼자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나 선생님, 같은 동네였던 친구 아무도, 내일이 현주 기일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현민이만큼은 어디선가 나만큼, 아니 이보다 덜 하더라도, 아파할 거라고 믿었다.

 

“현주, 오랜만에 듣네···.”

“···.”

“너무 과거에 살지 말자, 우리.”

 

심장까지 차가운 물이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굳이 ‘우리’라고 이야기 할 필요 없었다. 현민이가 말하는 건 ‘나’였으니까. 나보고 너무 과거에 살지 말라는 거다. 심장까지 차올랐던 물이 이제는 식도를 넘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삼켜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물이 귀에도 넘어왔는지 현민이가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잘 들리지 않아서 기억은 안 나지만, 들으나마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서히 차오른 물을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이젠 입 안에 가득 모였다. 그리고 난, 그대로 고개를 내려 다 게워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게 된 것은 내 속에 차올랐던 것이 깨끗한 물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더럽혀진 현민이의 반짝거리는 구두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

 

 

4.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주를 내 삶에서 오려낼 수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현주와 관련이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면 현주를 기억에서 지울 수 있다면, 아마 내 삶의 모든 것들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현주를 만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동네 놀이터에서 가끔 보고 지나친 적은 더 많았겠지만, 여섯 살 즈음에 열렸던 아파트 벼룩시장이었을 것이다. 말만 벼룩시장이지, 온갖 잡상인들이 다 모여 동네 꼬맹이들 코 묻은 돈을 뺏어가는 그런 행사였다. 나는 아마, 엄마한테 받은 용돈을 떡볶이나 음료수 사 먹는 데 다 써버리고 한 쪽 구석에서 금붕어들을 보고 있었다. 천 원만 주면 뜰채로 엄지손톱만한 빨간 색 금붕어를 잡아서 가져갈 수 있었는데, 난 그 천 원이 없어서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여섯 살 즈음의 현주가 왔을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 현주랑 둘이서만 있었던 적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나름 태연하게 금붕어 구경을 계속 했다. 현주는 굳이 내 옆으로 와서, 졸고 있던 아저씨한테 천 원을 내밀고, 뜰채를 받아왔다. 현주가 그때 말을 먼저 걸었는지, 내가 먼저 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새 우리는 꽤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물고기 잡을까?”

 

현주는 뜻밖에도 어떤 금붕어를 선택할지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사실 현주가 온 이후로는 금붕어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나는 당황해서 아무 물고기나 가리켰다. 아마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놈이었을 것이다. 현주는 물속에서 몇 번 뜰채를 휘적거리더니, 곧 금붕어 한 마리를 잡았다. 아저씨가 물이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넣어주자, 현주는 비닐봉지에 얼굴을 잔뜩 들이밀고 물고기를 구경했다. 나도 따라서 그렇게 했다. 금붕어는 온통 살색 덩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아마 금붕어가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금붕어는 내 눈동자보다도 작으니까, 금붕어의 눈으로 내 얼굴을 다 담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너 되게 물고기 닮았다, 라고 말을 건넨 것이 무례한 짓이었던 걸까. 근데 정말 현주는 물고기를 닮았다. 눈도 큰 게 천천히 끔벅거리는 게 (진짜 물고기는 눈꺼풀도 없어 깜박이지 못할 거지만) 딱 물고기를 닮았다. 현주는 그런 말 자주 듣는 다는 듯이 어깨를 살짝 으쓱일 뿐이었다. 현주는 곧 물고기가 담긴 봉지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휙 던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너 이 물고기 갖고 싶어?”

 

당연히 나는 그 물고기가 갖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현주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럼 이 물고기 삼켜봐.”

 

무슨 말인지 몰라 멍청하게 우두커니 서있던 나에게서 현주는 다시 금붕어가 담긴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뭔가 엄청난 일을 시키는 비밀스러운 말투도 아니었고,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했을 때 친구들을 모으는 것과 같은, 약간은 신나고 들뜬 목소리였다. 그에 반해 나는, 아마 저 네 단어 각각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합쳐진 문장 자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멀뚱히 그냥 서 있었다. 약간의 적막. 현주가 어서 잘못 말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물고기는 어차피 물에 사니까. 너가 삼키고, 빨리 집에 들어가서 토해내면 되잖아. 그것도 싫으면 그냥 입에 담고만 있어. 펠리컨도 그렇게 하잖아.”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저 문장이 이제는 꽤 그럴 듯하게 들렸다는 것. 그래서 금붕어가 담긴 봉지를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금붕어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너를 잠시 머금고 있으려고 해, 내가 할 수 있을까? 긴장해버린 탓에 입안이 말랐다. 없는 침을 모아 꿀꺽 삼키자, 갑자기 장 날 열린 시장 중앙에 있는 생선 가게가 생각났다. 우리 집에서 하는 생선 요리는 다 그 가게에서 산 생선들로 한 것이었다. 엄마는 늘 그 집 고등어가 싱싱하고 맛있다며 좋아했다. 늘 그 곳에 갈 때마다 나는 고등어를 쌓아두던 그 대야가 무서웠다. 그렇게 많은 죽음들을 옆에 두고 그 생선가게 집 아줌마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 엄마에게 생선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건네는 것이 신기했다. 현주가 삼키라고 준 금붕어를 바라보고 있자니, 죽어가던 고등어를 담가두던 빨간 대야의 찰랑거리는 물을 마셔야 하는 것 같았다. 이미 말라버려 움직일 수 없는 퀭한 눈동자를 적시던, 찰박거리는 썩은 물. 어렸을 때 과학 잡지를 구독해서 독서 퀴즈를 일삼던 나로서는, 내가 이 금붕어를 입 안에 넣고 앙 다문다면 만화 영화처럼 금붕어가 내 치아를 부수고 물고기 히어로처럼 의기양양하게 바깥세상을 향해 뛰쳐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내가 삼키기라도 한다면, 이 여린 친구는 내 위에서 위산과 함께 잘게 부서지겠지.

 

나는 그래서 금붕어를 삼킬 수 없었다. 현주는 꽤 지루한 모양이었다. 나랑, 내 손에 들려있는 금붕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곧 그냥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좀 쳐다보고 있다가, 나도 집에 가려고 보니 얼떨결에 나는 삼키지 않았는데도 금붕어를 가지게 되었다. 물고기를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집에 어항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주 어렸을 때 썼던, 그래서 잡동사니들과 함께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곤충채집통에 물을 넣고 그 금붕어를 넣었다. 제대로 된 어항 장치들도 없어서, 금붕어는 일주일 쯤 지나서 죽었다. 내가 목격한 살아있던 것의 첫 죽음이었다. 생선 가게에서 내장이 발린 채 쌓여 있던 고등어는 이미 죽어있었으니까. 조그마한 채집통에서 이리 저리 헤엄을 쳤던 금붕어가 거꾸로 뒤집힌 채 둥둥 떠 있는 모양을 보자, 나는 그 생선 가게의 비린내 나는 고등어가 생각이 났다. 빨간 대야에 담겨있던 얼음에 싸인 고등어들은 같이 죽어있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 금붕어는 외롭게 혼자 둥둥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이 슬펐다. 나는 많이, 엄청 많이 울었다. 엄마는 그 죽은 물고기를 맨 손으로 건져내어, 휴지에 사체를 한 번 감싼 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순식간에 변기 안의 물 회오리를 따라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또 다시 울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그 물고기를 삼킨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금붕어를 삼켰으면 그 친구는 죽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까? 금붕어를 삼켰다면 현주는 나를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금붕어는 그 채집통과 관찰하는 나에 갇혀 길이가 30cm도 안 되는 어항을 배회하며 살아가기 싫었을 지도 모른다. 휴지에 감싸진 채 변기통에 버려졌을 때부터 금붕어에게는 재미난 삶이 시작된 것인 것이다.

 

*

 

나는 그 이후로 이상한 병에 걸렸다. 현주를 볼 때마다, 뱃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속이 메스꺼운 것도, 배변감도 아니었다. 작고 동그란 무언가가 내 장기들을 다 건드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현주를 볼 일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같은 동네다보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같은 곳을 나왔고, 같은 반이었던 적도 한 세 번 있었다. 금붕어 일만 생각해보면 현주만큼 그렇게 유별나고 독특한 애도 없을 것 같은데, 막상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니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친구일 뿐이었다. 같은 반 되면 같이 밥 먹고, 같이 음악실 가고, 같이 하교 하고. 그러다보니 고등학생 때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현주에게 관심이 갔다. 현주를 보면 배 속에서는 자꾸 물고기가 콕콕 찌르는 느낌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현주와 함께 있으려고 그 느낌과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현주에게 ‘집중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까만 교복이 까만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있는 현주도 나는 잘만 보였다. 하지만 현주는 나한테 늘 시시콜콜한 것만 이야기했다. 오늘 날씨 정말 좋지 않냐, 이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문제는 해가 쨍쨍 나서 땀이 나는 날도, 비가 펑펑 오고 천둥이 쾅 내리칠 때도, 구름 한 점 없이 하늘 파랄 때도 늘, 오늘 날씨 좋지 않냐-로 대화를 시작하고 끝냈다는 것이다. 듣는 이가 내가 아니더라도,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적당히 대화의 여백을 채우기 좋은 그냥 그런, 날씨 이야기.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궁금해 하지 않으면 구태여 알려주려 하지 않고, 물어봐도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퀭한 눈에 빛이 도는 것을 보고 싶어서 나는 현주의 옆에서 늘 재잘거렸다. 현주는 본인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내가 옆에 있을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그 옆에 누가 있든 현주는 전혀 상관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나의 공허함을 채웠다. 택배는 계속 보내는데 주소가 잘못 되어 우체국에서 먼지 쌓인 채 유보되는 것처럼, 나의 재잘거림은 늘 도착지 없이 허공을 맴돌다 끝났다.

 

 

5.

 

현주가 현민이를 처음 내 앞에 데리고 온 건, 오후 12시인데도 비가 곧 오려는지 어두컴컴하고 습기 가득한 그런 심상치 않은 날이었다. 그때 현민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였으니까 여기 저기 다니다가 몇 번 마주쳤을 것은 당연하니까. 그래도 현주가 스스로 누군가를, 그것도 남자인 누군가를, 심지어 애인이라는 누군가를 내 앞에 데리고 온 것은 처음이었다. 현민이의 첫 인상은, 이걸 듣게 된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어쨌든 정말 별로였다. 얼굴도 절대 잘생긴 축에 속하지 않고, 요즘 은근히 인기 있는 개성 있는 그런 편도 아니었다.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얼굴, 키는 좀 크긴 한데 손가락은 뭐 그리 두꺼운 지. 심지어 곧 비가 올 듯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미세하게 떨어지는데도 점심시간에 다른 남자 애들이랑 축구를 해야 한다고 나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가버리는 그런 성질 급한 애를 대체 왜. 그런데 현민이를 바라보는 현주의 눈빛은 미묘했다.

 

“오, 쟤랑 사귀는 거야? 언제부터?”

“일주일 전부터. 애가 되게 웃기더라고.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는 않아.”

 

이거 완전 나 멕이는 건데. 나랑 있을 때는 지루하다는 거네. 순간 살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 애보다 몇 년을 더 너랑 붙어 있었는데. 그래 이제 걔랑 잘 먹고 잘 살아라. 난 이제 관심 없어.

 

“현주 너 눈 되게 낮구나. 난 쟤 되게 별론데. 윽, 못생겼어.”

“설마 너 쟤 좋아해?”

“내가 쟤를? 설마. 난 진짜로 쟤 되게 되게 싫어. 저런 애랑 왜 사귀냐.”

“아니 뭐, 잘 알지도 못하는 애를 초면부터 너무 까길래. 난 또 네가 쟤 좋아하는 줄 알았네.”

 

남자친구 험담이라도 하면 발끈 화를 내거나, 아니면 구구절절 왜 못생긴 남자애랑 사귀는 지 이유라도 이야기해줄 줄 알았는데. 내 성질에도 별 관심 없는 현주의 화법은 또 나만 성질 더러운 애라는 걸 상기시킨다. 빌어먹을 날씨 이야기처럼, 내 생각 내 감정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가벼운 이야기일 뿐이다.

 

 

*

 

경쾌하게 울리는 낯선 휴대폰 벨소리.

1분이 지나자, 팍 식어버리듯 음악이 끊긴다.

 

“현민이 아니야? 왜 안 받아?”

“너무 잘 받아주면 재미가 없잖아.”

“너네 싸웠어?”

“원래 연인들끼리는 갑자기 싸우고 하다가 풀고 그러는 거야.”

 

 

*

 

사실 현주의 일기장을 한 번 훔쳐본 적이 있었다. 사물함을 착각하고 무심코 읽었다는 것은 내가 현주에게 들켰을 때를 대비한 거짓말이고, 사실 매우 계획적으로 현주가 없는 틈을 타 몰래 훔쳐보았다. 나한테는 맨날 재미없다는 말만 하면서, 일기에는 어떤 재미난 일들을 써 놓았는지 궁금했다. 내 맘에는 안 드는 남자애를 남자친구로 만든 것에 대한 일방적인 화풀이 감정도 들어있긴 했다. 아무런 문양도 없이 그냥 초록색 반질거리는 재질의 표지가 다인 현주의 조그만 수첩에는 조그마한 글씨가 듬성듬성 채워져 있었다. 아무런 글도 쓰이지 않은 날짜가 더 많았다. 그냥 오늘도 재미가 없고, 내일도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그런 글들. 나한테 맨날 하는 날씨 얘기랑 비슷한 그런 삶에 대한 무미건조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일기장에 있는 일기들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현민이랑 사귀게 된 날 이후로는 현민이 이야기도 조금씩 들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내 이야기는커녕 내 이름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뱃속 안에서 헤엄치던 물고기가 이젠 빠르게 내 머릿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속에 내 두뇌를 넣어놓은 느낌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기장을 덮어 현주의 사물함에 그대로 넣어놓았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학교에서 엎드려 잠만 잤다. 현주는 나에게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

 

“나는 네 남친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진짜 무슨 날라리 같아.”

“갑자기 또?”

“바지를 너무 줄여 입잖아. 무슨 스타킹 신은 거 같아. 부담스러워.”

“걔가 그러는 게 재밌다니까. 너는 선생님들이랑 똑같은 말만 하네.”

 

6.

 

어휴, 얘가 왜 이렇게 밥을 못 먹어 하며 등을 찰싹 때리는 엄마 때문에 입 안에서 가득 씹고 있던 고등어 살점들이 밥상으로 튀어나왔다. 질질 흘리는 거는 영락없이 애야, 하며 그것을 집어 본인 입으로 가져가는 엄마의 모습에서는 갑자기 왠지 모르게 엄마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갑한 마음에 옆에 놓여있던 유리잔에서 물을 다 들이켰다.

 

“남자친구는 왜 같이 안 왔어? 같이 오라니깐…….”

“싸웠어, 오늘 아침에.”

“아니 순해보이더니만, 왜 싸워?”

 

호리호리해보여도 성질은 괴팍해-튀어나오려던 말을 꾹 참고 그냥 엄마한테 싱긋 웃어보였다. 엄마는 아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구이가 된 고등어의 뼈에서 살을 발라내고, 내 밥그릇에 얹어주었다. 윤기가 흐르는 흰 색 살점 덩어리에서 군데군데 삐죽한 뼈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우리 엄마도 제법 노안이 왔나 보다. 적당히 간이 배어 알맞게 짭짤한,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등어구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엄마의 음식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남의 집에서 잔이나 깨 부시고 앉아있는 놈한테 줄 순 없지.

 

“오늘이 현주 기일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말에 나는 또 사례가 들려 입안에 들어있던 밥 알갱이들을 식탁 위에 기어이 뱉어냈다. 어제 현민이는 기억 못하던 현주 기일을, 6년이나 지난 지금 엄마가 기억하고 있다. 집이랑 무척 가까운 고등학교를 지나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 먼 길을 돌아오며, 학생 때 추억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살았는데. 놀라 쳐다보니 엄마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탁 위에 뱉어놓은 씹던 밥 알갱이들을 질색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너는 무슨 애가 이렇게 먹던 걸 자꾸 뱉어놔. 더러워 죽겠어!”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현주 기일을 어떻게 알아?”

“아니 오늘 이거 고등어 사는 곳에서 들었어. 너 어릴 적부터 고등어는 여기서만 샀잖아. 기억나지? 그 아줌마가 현주 엄마랑 또 아는 사이더라고. 오늘 제사 지낸다고, 현주 엄마가 거기서 조기랑 도미 사갔다 하더라고. 너 현주랑 되게 친했잖아.”

 

그랬구나, 괜히 나 혼자 예민해져 있었다. 놀란 고양이의 털처럼 곤두세웠던 감각들이 사그라들자, 또 괜히 슬퍼졌다. 나 혼자만 현주를 지우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없다. 이 마을, 동네 전체에 현주가 묻어있다. 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생선을 사 간 현주 엄마는, 이 동네의 누군가가 자기 딸을 자꾸 지우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괘씸해할까.

 

“아니 근데, 현주 걔도 참 불쌍한 애야. 마음의 병이 오죽 심했으면 유서도 미리 써놓았겠어. 걔네 엄마도 그렇게 고생 많이 했다더라. 우리 딸은 그런 거 없지?”

 

엄마가 말하는 마음의 병은 우울증을 말하는 것이다. 엄마의 걱정은 늘 그렇게 당신 딸로 끝난다. 엄마가 밥그릇에 곤히 얹어놓은 고등어 살점 하나를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종이를 씹는 맛, 물에 젖은 신문지를 씹는 맛.

 

이후에, 그러니까 현주의 자살 이후에, 현주의 방에서 유서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사실 일기장을 발견한 것인데, 그 일기에 유서가 쓰여 현주의 일기 전체는 경찰이 현주의 죽음을 자살로 결정지은 증거가 되었다. 매일 매일이 우울하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삶이 끝나길 빌며 사는 삶은 너무 지루하다 등등. 일기장의 이야기가 반 친구들의 입에서, 시장 장터의 아줌마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때 듣던 사람은 서로 놀라며 현주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랐다. 나에겐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일기를 훔쳐본 건 맞지만 유서를 보지는 못했는데, 어쨌든 맨날 나랑 만나면 하던 이야기가 어쩌면 그런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중요한 건, 왜 현주 너는 삶에 흥미를 못 붙이느냐 였다. 나는 현주 너 덕분에, 네가 나에게 금붕어를 먹어보라고 권했을 때부터 너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너 때문에 뱃속에 물고기가 들어있나 하는 환상이 들고 너 때문에 내일은 무슨 화두를 먼저 던져 날씨 얘기 좀 그만하게 해달라고 빌며 매일 매일이 긴장 상태였는데.

 

 

*

 

엄마 나 좀 체한 거 같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큰 숟가락에 매실 원액을 한 가득 담아 내 입에 담아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매실이 보약이었다. 누가 체를 하거나, 회나 육회, 소 생간 같은 날 음식을 먹고 와도 늘 매실 원액을 소주잔에 담아 마셔야 했다. 그러면 정말 끈적한 매실 엑기스가 식도부터 쭉 내려가며 막혀있던 속을 뚫어주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기어이 두 숟가락을 더 먹이고는, 일찍 자라며 내 방으로 나를 떠밀었다.

 

자는 시간이어야 잠이 들지, 이제 저녁 8시 밖에 안됐는데 잠이 올 리가 있나. 더군다나 오늘 같은 날에. 침대에 누운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 벽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연분홍색 배경에 하얀 꽃들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는, 20년은 훌쩍 넘긴 오래된 티를 물씬 내는 오래된 벽지다. 현주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주었을 때도 이 침대에서 이렇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을 텐데. 사실 굳이 엄마 집에서 나가서 따로 살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성인이니까 독립을 해야지 하는 얄팍한 핑계를 대며 내 돈이 아닌 돈으로 오피스텔을 구했다. 천장을 가만히 보니 벽지가 많이 울어있다. 마치 물에 잠겼다가 말린 종이처럼 구깃구깃하네, 빨리 돈 벌어서 우리 집 리모델링 좀 해줘야지.

 

바깥은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지 덜거덕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가 들린다. 나는 두 눈을 감으며 그냥 빨리 잠이 들기를 빈다. 이제 눈 뜨면 내일이 되게 해주세요. 이제 다시 눈 뜨면 더 이상 현주 기일이 아닌 날이 오게 해 주세요. 가만히 누워 빌고 있으니까, 갑자기 또 종아리 뒷면이 가렵다. 무시하려고 해도 개미가 올라오듯 거슬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신경질적으로 긁고 나니 이제는 또 정수리가 가렵다. 그 다음은 새끼발가락. 그 다음은 오른 쪽 옆구리 살. 제발 잠 좀 들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

 

지금 어디지?

내가 뭐하고 있었지?

어렴풋이 내가 온 몸을 긁고 있었다는 사실이 머릿속 저 멀리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몸은 또 매우 무겁다. 아, 잠에 드는 것이 성공했다. 이제 편하게, 좀 더 깊게 무의식을 헤매다가 눈을 뜨면 된다. 그러면 된다. 나는 이미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으며, 내일 아침까지 눈꺼풀에 자물쇠를 채우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자꾸, 눈꺼풀에 힘을 주면 줄수록 더 선명하게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또 물속이다. 또.

뿌옇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아, 아니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형체가 다가오기는 하는데 물살 때문에 울렁거려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담스러워. 얼굴을 좀 떼 봐봐.”

 

아, 또 현주. 현주 목소리.

 

“얼굴을 떼라고?”

“어. 너 지금 얼굴 엄청 커. 눈알밖에 안 보여.”

 

얼굴을 떼라는 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돌리자, 이럴 수가, 나는 지금 여섯 살 때 그 아파트 벼룩시장이다. 나는, 내가 지금 여섯 살인가? 알 수 없다. 그냥 그때 풍경이 그대로 보인다. 오후 세 시쯤 되어서 쬐이면 아픈 햇빛은 다 들어갔고, 옆에는 애들 코 묻은 돈으로 장사하는 여러 어른들이 보이고. 어디엔가 있는 축제용 스피커에서 아동용 동요가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그리고 나는, 현주가 내 품에 안겨주었던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봉지를 들고 있다. 그 봉지에 얼굴을 잔뜩 들이밀고 서 있었다. 마치 그 때 빨간 금붕어와 눈을 마주치려 했며 너를 삼켜야 하나 고민했던 그 때처럼. 필시 물 안의 무언가는 내 얼굴을 큰 하나의 살색의 덩어리로 보고 있겠지. 오히려 얼굴을 떼고 나니 물 봉지 안에 들어있는 것은 더 자세히 보였다. 지느러미와 꼬리가 달려 있는 빨간 색 금붕어인줄 알았는데, 얼굴이 달려있다. 현주다. 꽤 기괴한 모양에 나는 놀라 하마터면 물 봉지를 놓칠 뻔 했다. 이게 뭐야, 너무 흉측해.

 

“현주야, 너 왜 거기 있어?”

“뭐, 사실은 내가 너의 물고기인거지.”

“제발 그냥 돌아와. 그렇게 물속에, 작게 있지 말고. 그냥 눈 마주치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제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줘.”

“넌 그게 문제라니까. 이렇게 물속에서 헤엄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난 이대로 바다로 갈 거야, 너가 보내준다면.”

“그럼 그렇게 있어. 이제 답해봐. 그때 왜 나한테 전화한 거야. 왜 나한테 전화했어. 나 재미없다며. 일기장에 내 말 한마디 없었잖아. 근데 왜 나한테 전화했어. 왜 너가 가버리고 난 후에 나만 혼자 미련 남게 만들어. 왜 그랬어, 왜!”

 

현주(라고 불러야할지 금붕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는 물속에 가만히 있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내 눈을 쳐다보는지 내 입술을 쳐다보는지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내 얼굴의 여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내 얼굴이 있는 쪽을 향해 가만히 둥둥 떠 있을 뿐이다. 나는 화가 났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뱃속부터 뜨거워진 무언가가 점점 차올라 식도를 거쳐 입 안으로 넘어왔다. 그것을 뱉어내려고 입을 열었는데, 정작 내 입에서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이 빠르게 쏟아질 뿐이었다.

 

“애초에 나한테 말을 걸지 말지, 그래 우리 꼬맹이 때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말을 걸지 말지 그랬어. 나는, 내 인생은 너랑 섞여버렸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근데 너한테 난 너무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너무 비참했어. 아니 차라리 그냥 그렇게 비참하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 때 전화를 대체 나한테 왜 했는데? 내가 정말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니었으면, 너 기일도 기억 못하는 네 고딩 때 남친 때보다도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으면, 왜 나한테 전화했냐고!”

폭발하는 화산이 용암을 쏟아내듯 말을 다 퍼붓고 나니까, 그 용암을 식힐 비라도 내리는 듯 이제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왜 그랬냐고-하는 말만 웅얼거리며 끅끅 오열했다. 정신없이 울다 보니 어느새 내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아, 나 꿈 꾸고 있었지. 그래서 이런 비현실적인 전개가 가능하지. 물속에서 나는 한동안 속을 진정시키며 둥둥 표류해있었다.

 

“이제 진정이 좀 됐어?”

 

어디선가 멀리서 웅웅거리며 들리는 소리. 익숙한 느낌. 이제는 내가 또 물 봉지 안에 들어와 있고, 거인 현주는 거대한 눈알을 나에게 들이밀고 있다. 속이 조금 울렁거린다.

 

“여긴 너의 꿈속이니까…….”

 

살색 덩어리인 현주는 잠시 멀어지더니, 이번에는 물 봉지 안으로 손을 넣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몸집보다 수십 배는 더 큰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나를 향해 쫓아오니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한 동안 씨름을 하다가 나를 붙잡은 두 손가락이 천천히 나를 들어올렸다. 점점 물 밖으로 나오자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헐떡, 헐떡거리며 현주의 손바닥에 나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현주는 손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다른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애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잘못 쓰다듬었다간 나의 지느러미가 잘려나가거나, 나의 내장이 눌려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

 

“너의 꿈속이니까, 너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해 줄게.”

“··뭐?”

“이제 나도 너랑 섞일 거야. 뗄 수 없어. 너가 원하는 것처럼.”

 

현주는 두 손가락으로 나를 집어 천천히 들어올렸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그냥 힘이 빠진 채 현주의 손가락에 가만히 들려있었다. 현주는 아주 느리게, 나를 자기 입 안에 넣었다. 혀로 몇 번 나를 이리 저리 굴리다가,

 

“잘 자. 좋은 꿈 꿔.”

 

이내 나를 꿀꺽 삼켰다.

나는 깊은 어둠으로 떨어졌다.

아직 바닥에 닿지 않은 채 먼 어딘가로 빠르게 추락하면서,

곧 아스라이 조각조각 흩어질 내 몸뚱이를 생각하며,

위산으로 녹아버릴 내 파편들을 생각하며,

환희에 찬 안도감에 그만 정신을 잃었다.

 

 

 


 

김수빈 | 안녕하세요, 김수빈입니다. 1남1녀 중 장녀로, 언제나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유교걸’입니다. 유쾌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만 실생활에서 행동이 영 어색해서, 글이라도 재밌게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혈액형은 B형, MBTI는 ISFJ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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