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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

축구공의 무덤 축구공의 무덤 김수빈 1. 분명히 황민희는 투시를 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까 세시 반 쯤. 청소시간. 갑자기 소각장 있는 대로 나를 부르더니, 잠자코 서서 그 애는 몇 분 째 계속해서 내 손을 쳐다보던 중이었다. 분명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어찌나 그 주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던지, 얘가 지금 투시를 해서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쥔 내 손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약간 무서웠다. 혹시 모르니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고 있다가 가운데 손가락, 그러니까 세 번째 손가락만 치켜세우고는 민희의 표정을 관찰했다. 진짜 투시를 하는 건가? 민희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리더니 이제는 내 얼굴을 쳐다본다. 갑자기 긴장이 되어서 손에는 땀이 가득 찬다. 뭐, 뭐 어쩔 건데. 내가 내 손가락 내 주머니에서 피겠다.. 2021. 9. 16.
독사 (獨死) 독사 (獨死) 이겨레 ※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자살에 대한 언급 및 묘사가 나옵니다. 잔인한 장면은 나오지 않으나 민감한 소재인 만큼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나이 지긋한 여자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보고 있는 그림은 앤드루 와이어스의 로, 여자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그림이었다. 여자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수차례 본 그림인데도 여자는 전시를 다 보고 나서 다시 돌아가 그 그림을 한번 더 보고는 전시관에서 나왔다. 미술관에서 나올 때 여자의 표정은 긴장되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느긋해 보였다. 여자는 오늘 하루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예감이 좋았다. 여자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해서 언제나 자신이 생각해 놓은대로 하루를 보냈다.. 2020. 8. 29.
님이의 창문 밖에서 님이의 창문 밖에서 전여운 1. 님이를 처음 만난 그해 여름의 난 어땠을까. 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난 사내애처럼 머리를 자른 깡마른 계집애였고, 그런 이질적인 외모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분홍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인형이나 옷 입히기 스티커 따위를 좋아하던 동네 계집애들은 말수가 적고 겉보기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나를 슬슬 피했다. 비비탄총과 디지몬 게임기를 들고 나다니던 사내애들 역시 날 놀이에 끼워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난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 까지도 변변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왜 집에 가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그 시기, 내가 초등학교에 딸린 유치원을 다니다가 그 초등학교에 입학해 삼 학년.. 2020. 8. 29.
그 가정의 방문 (하) 4.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우습게도 추락이다. 추락이라기보다는 배신에 더 가까울 테지만 끝끝내 난 추락이라고 칭하기를 고집했다. 끔찍하게 추한 태도였지만 모든 배신자의 말로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염수진의 집에서 돌아오고 몇 주 후, 방학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수업을 듣고, 복습을 하고, 연습문제를 풀고, 과제를 냈다. 염수진 역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그 때부터의 일상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염수진은 상경대학 공동대표가 되었다. 2학년 때는 공동 과대표를, 3학년 때에는 단과대 공동대표를 단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대 후보들이 상경대 내에서 꽤나 인기몰이를 하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염수진의 팀은 압승을 이루어냈.. 2020. 7. 16.
그 가정의 방문 (상) 그 가정의 방문 전여운 0. 염수진의 실종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을지로였다. 그 날 나는 데면데면한 경제 3반동기들과 함께 졸업 기념 모임이었나, 취직 기념 모임이었나, 때문에 을지로의 한 치킨집에 있었다. 연구실에서 석사논문과 씨름하던 내가 그 자리에 끼게 된 것은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는 반장 때문이었다. 꼭 오라는 반장의 손에 이끌려 왔지만, 동기들과 별다른 추억도 없고,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도망치듯 타대 대학원에 진학한 나로서는 미적지근한 모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의 졸업 얘기, 취업 준비 얘기, 또 직장생활 얘기는 김빠진 맥주처럼 미지근하고 끝 맛이 썼다. 하지만, 봄아, 너는 석사 하고는 뭘 하고 싶어? 라고 질문이 돌아왔을 때에 난 해사한 얼굴로 박사 학위까지 따고 싶다고 대답했다... 2020. 7. 15.
거짓말 탐지기 거짓말 탐지기 장상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불안했고 그만큼 매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찼다. 그들은 매일 머리채라도 잡혔다 풀려난 것처럼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채 매일 밤늦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모두 스트레스성 장염을 자주 앓았던 탓에,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 다른 고3들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어른들은 마치 성전에 출전할 기사들을 보는 양 그들을 대접하고 볼때마다 안쓰러워 혀를 찼다. 한번은 그들 중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학생, 여기 앉아요. 고생도 많지!” 하면서 자리를 양보해줄 정도였다. 그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 예정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자리에 대..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