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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6

월간 마틴 클럽 월간 마틴 클럽 (월간권태 편집장들의 말말말★) 월간 권태 2호의 가장 마지막 글 (특집으로 실린 글이었지만 꽤나 흥미롭기 때문에 홈페이지에도 올리기로 결정했다) ‘세 명이 모여서 잡지를 만들고, 심지어 두 권이나 내다니, 필시 저 셋은 어렸을 때부터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운명적인 공동체임이 틀림없어!’라고 생각하고 계실 누군가를 위해 말씀드리자면, 월간 권태 클럽은 정말 ‘월간 권태’ 잡지 발행을 목적으로 2020년도에 만들어진 인위적이고 비교적 최신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0년도 이들의 모임들을 분석해보면 전부 ‘월간 권태’의 발행을 안건으로 회의하고 또 회의했고, 심지어 술 마시는 자리에서도 이들은 작품과 잡지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했다. 접점도 별로 없어 보이고, 친목질도 별로 하.. 2021. 9. 16.
따릉이(2020.4.30)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의 장점은 여러 개지만, 삶은 연예 일간지처럼 미심쩍은 것과 단점 사이의 애매모호한 것만 부풀리는 경향이 있어, 어쩌면 잊고 지낸 서울의 가장 큰 장점은 흔히 발걸음에 채는 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대도시가 제공하는 가장 작은 장점으로 ‘둔갑하고 있는’ 공공 자전거가 사실은 아주 작지만 값비싼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서울시 외의 곳에도 공공 자전거는 많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따릉이가 그런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딴지를 걸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자원은 그 희소성과 유용성에 따라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자명하나 그 희소성은 꼭 유일함에서 비롯될 필요는 없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공공 자전거가 있는 다른 도시의 주민들이 이 글에서의 따릉이를 통.. 2021. 7. 20.
월간 권태 2호 비하인드 -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월간 권태 2호를 만들면서 느꼈던 감정을 간단하게 적어보았습니다.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2020년 상반기의 심정은 딱 이것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되었다. 휴학 한 번, 교환학생 한 번 없이 꾸역꾸역 쉼표 없이 달려온 결과였다. 왜 한 번도 쉬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것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지역에서 공부로는 한 가닥 했다는 학생들만 모인 특수목적고에서 경쟁하고, 수능을 두 차례나 치렀다. 마지막으로 쉬었던 건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누워서 지냈던 그해 겨울이었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도 무언가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고서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고, 경주는 그때 다시 시작해서 끝나지 않았다. 경쟁과 승부사의 연속이었던 학생.. 2021. 3. 18.
보류됨의 즐거움에 대해서 보류됨의 즐거움에 대해서 전여운 무언가를 보류하는 것을 좋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성질이 급한 아이였고 빨리 답을 받기를 원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알 때 까지 문제에 매달렸고, 온갖 책을 찾아가면서 답을 찾았다. 다음에 해야지, 라는 말은 거의 한 적이 없었다. 시작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끝을 좋아하고, 문제를 좋아하는 만큼 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결론, 정해져 있는 것, 결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고, 궁금해 하고, 확실히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삶의 크고 작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네게 이 보류되어 있는 시간이 썩 좋지 않니, 하고 건넸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넌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그 보류되어 있는 시간은 정체모를 널 두고 절절매던 시간.. 2020. 7. 8.
그 날의 지문은 그 날의 지문은 전여운 핸드폰의 지문 인식 기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손가락을 돌리면서 양쪽 엄지의 지문을 각 두 번씩이나 등록해 두었지만 여전히 먹히지 않는다. 결국 지문 인식을 통한 잠금 해제는 30초 뒤에 다시 가능하다는 암울한 메시지가 뜨고, 어쩔 수 없이 패턴을 입력해 화면을 켠다. 사람의 지문은 그 자체로 아주 완벽한 인증 시스템이다. 지문은 사람마다 고유하고 ‘이론적으로는’ 절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그 지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찾아낼 수 있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만들던 그해 겨울에 난 수험생의 음울함이 덜 가신 밋밋한 낯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눌러 찍었다. 그날 보았던, 인주를 묻혀 찍은 지문은 마치 짓눌린 포도 같았다. 그 짓눌린 포.. 2020. 7. 8.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김수빈 제기랄. 밤 10시에 나체 차림, 팬티 한 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물을 잔뜩 빨아들여 질퍽한 빨래 더미를 바닥에 쌓아두고, 하나씩 건져 올려 손수 물을 짜내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내가 목격하게 될 줄 몰랐다. 이 손 바닥만한 원룸 자취방에 물은 흥건하고, 화장실에 있는 전면 거울에서 내 벌거벗은 몸을 마주하며, 세탁기를 나둔 채 하나하나 물을 짜내는 초라한 몰골이 내 꼴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망할 세탁기. 이 망할 701호. 이 망할 코딱지만 한 원룸. 망할 자취. 망할 서울. 내 계획은 완벽했다. 53분의 긴 세탁과정이 끝나면 건조대에 차곡차곡 여백 없이 빨래를 걸어놓고, 내일 눈 뜨면 뽀송하게 말라 있을 것을 기대하며 창문도 살.. 2020.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