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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빈2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 세탁기에 관한 원초적 분노김수빈 제기랄. 밤 10시에 나체 차림, 팬티 한 장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물을 잔뜩 빨아들여 질퍽한 빨래 더미를 바닥에 쌓아두고, 하나씩 건져 올려 손수 물을 짜내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내가 목격하게 될 줄 몰랐다. 이 손 바닥만한 원룸 자취방에 물은 흥건하고, 화장실에 있는 전면 거울에서 내 벌거벗은 몸을 마주하며, 세탁기를 나둔 채 하나하나 물을 짜내는 초라한 몰골이 내 꼴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망할 세탁기. 이 망할 701호. 이 망할 코딱지만 한 원룸. 망할 자취. 망할 서울. 내 계획은 완벽했다. 53분의 긴 세탁과정이 끝나면 건조대에 차곡차곡 여백 없이 빨래를 걸어놓고, 내일 눈 뜨면 뽀송하게 말라 있을 것을 기대하며 창문도 살.. 2020. 6. 30.
소화의 과정 소화의 과정 김수빈 1. 지독한 악몽이었다. 잊어버릴 때 즈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그렇게 시달리고 나고 깨면, 다시 그 꿈을 꿀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분 나쁜 미묘함에 잠시 머리를 짚고 있다 보면, 곧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고, 곧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몽의 후유증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이 기분 나쁜 꿈보다 현실이 더 악질일 수는 있겠지만. 씻으러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더 본다. 3월 29일, 아침 6시 반이다. 딱히 기억나는 일정이라곤 없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 늘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몸이 시원찮다. 기지개를 쭉 피며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찰나, 누.. 2020.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