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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예지12

전여운 - 첫 번째 권태인: 프랑수아즈 사강 이달의 권태인: 프랑수아즈 사강 전여운 창간호의, ‘이달의 권태인’ 칼럼을 맡는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감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는 팀과의 논의에도, ‘권태인’이라는 호칭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의 기저에는 권태를 체험하지 못해 본 것은 아니나,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권태감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이해는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권태인’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권태’라는 개념을 개인의 언어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권태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다. 이 거시적인 정의는 다소 모호하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권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작용보다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작용점에 주.. 2020. 8. 30.
장상 - 독사 (獨死) 독사 (獨死) 이겨레 ※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자살에 대한 언급 및 묘사가 나옵니다. 잔인한 장면은 나오지 않으나 민감한 소재인 만큼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나이 지긋한 여자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보고 있는 그림은 앤드루 와이어스의 로, 여자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그림이었다. 여자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수차례 본 그림인데도 여자는 전시를 다 보고 나서 다시 돌아가 그 그림을 한번 더 보고는 전시관에서 나왔다. 미술관에서 나올 때 여자의 표정은 긴장되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느긋해 보였다. 여자는 오늘 하루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예감이 좋았다. 여자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해서 언제나 자신이 생각해 놓은대로 하루를 보냈다.. 2020. 8. 29.
전여운 - 님이의 창문 밖에서 님이의 창문 밖에서 전여운 1. 님이를 처음 만난 그해 여름의 난 어땠을까. 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난 사내애처럼 머리를 자른 깡마른 계집애였고, 그런 이질적인 외모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분홍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인형이나 옷 입히기 스티커 따위를 좋아하던 동네 계집애들은 말수가 적고 겉보기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나를 슬슬 피했다. 비비탄총과 디지몬 게임기를 들고 나다니던 사내애들 역시 날 놀이에 끼워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난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 까지도 변변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왜 집에 가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그 시기, 내가 초등학교에 딸린 유치원을 다니다가 그 초등학교에 입학해 삼 학년.. 2020. 8. 29.
장상 - 올랜도와 글쓰기에 관하여 올랜도와 글쓰기에 관하여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를 읽고 장상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는 이미 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나 여러 논문에서 페미니즘을 중점으로 하여 여러 차례 분석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에서 올랜도가 글 쓰는 것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일단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실은 글쓰기를 싫어하는 게 아닌가? 막상 구상을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즐겁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그 즐거운 와중에도 나는 내 옆에서 누군가가 내가 쓰는 글을 훔쳐보면서 비웃는 것만 같아 기가 죽는다.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난 후에는 근거 없.. 2020. 8. 1.
전여운 - 그 가정의 방문 (하) 4.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우습게도 추락이다. 추락이라기보다는 배신에 더 가까울 테지만 끝끝내 난 추락이라고 칭하기를 고집했다. 끔찍하게 추한 태도였지만 모든 배신자의 말로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염수진의 집에서 돌아오고 몇 주 후, 방학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수업을 듣고, 복습을 하고, 연습문제를 풀고, 과제를 냈다. 염수진 역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그 때부터의 일상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염수진은 상경대학 공동대표가 되었다. 2학년 때는 공동 과대표를, 3학년 때에는 단과대 공동대표를 단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대 후보들이 상경대 내에서 꽤나 인기몰이를 하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염수진의 팀은 압승을 이루어냈.. 2020. 7. 16.
전여운 - 그 가정의 방문 (상) 그 가정의 방문 전여운 0. 염수진의 실종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을지로였다. 그 날 나는 데면데면한 경제 3반동기들과 함께 졸업 기념 모임이었나, 취직 기념 모임이었나, 때문에 을지로의 한 치킨집에 있었다. 연구실에서 석사논문과 씨름하던 내가 그 자리에 끼게 된 것은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는 반장 때문이었다. 꼭 오라는 반장의 손에 이끌려 왔지만, 동기들과 별다른 추억도 없고,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도망치듯 타대 대학원에 진학한 나로서는 미적지근한 모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의 졸업 얘기, 취업 준비 얘기, 또 직장생활 얘기는 김빠진 맥주처럼 미지근하고 끝 맛이 썼다. 하지만, 봄아, 너는 석사 하고는 뭘 하고 싶어? 라고 질문이 돌아왔을 때에 난 해사한 얼굴로 박사 학위까지 따고 싶다고 대답했다... 2020. 7. 15.